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트 2세 (문단 편집) === 황제 추대 및 [[30년 전쟁]]이 시작되다 === 1617년에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다는 것은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을 매우 불안하게 했다. 그동안 [[루돌프 2세]]가 내려준 칙서 덕분에 신앙의 자유를 누렸는데, 페르디난트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신교도들을 몰아낸 일로 상당히 유명했던 구교 신자였다. 결국 이들의 예상대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을때 신교도의 재산을 빼앗고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처형하며[* 특히 공개적으로 참수형에 처했는데 이는 신교도들의 분노를 샀다.] 신교도들한테 가톨릭으로 개종할것을 강요했다. 이때문에 보헤미아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나중에는 과격한 신교 상인들에 의해서 구교 성직자들을 종탑에서 떨어트리는 '프라하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도 전부 살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내전의 시발점이 될만한 사건이라서, 보헤미아 주변은 심심하면 치고받는 전쟁터가 된다.] 앞선 사건의 충격과 함께, 보헤미아 상인과 주민들이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그와 싸울 준비를 하자, 그는 제국 보수파들한테 이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주장하며 군대를 파견하면서 내전의 맞불을 지폈다. 특히 마티아스 황제의 총신인 멜히오르 클레즐 추기경이 보헤미아의 반란에 미지근하게 대응하자, 1618년 페르디난트 2세는 이를 빌미로 클레즐을 투옥하여 [[인스브루크]]의 암브라스 성에 가둬버렸고, 신성 로마 제국 의회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이 반발하며 의회에서 페르디난트의 폐위를 선언하였으나[* 클레즐 추기경은 가톨릭 교도이나 개신교도에게도 관대하며 두 종교간의 화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페르디난트가 가둔것 자체가 개신교에 대한 관용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미가 되었다.] 다른 선제후들의 지지로 명목상으로는 보헤미아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위의 이런 고생--협잡--을 거친 끝에 '''161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 휘하 장군인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틸리 백작]]의 활약으로 보헤미아의 반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1622년 그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른 것을 반역으로 간주하여 그의 [[선제후]] 직위를 박탈하고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선제후 직위를 하사하였다.[*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은 선제후 직위와 [[오버팔츠]]의 영유를 확정지었고,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도 선제후 직위를 돌려받았다. 덕분에 선제후가 7명에서 8명으로 늘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